쌍둥이 세 자매, 똑같은 옷을 입고 파파, 마마, 하며 어리광을 부리는데 어찌 귀여워하지 않겠는가.
셋이서 하나처럼 살아온 우리는, 그 당시 기호도 성격도 아주 몇몇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대개 기호도 성격도 비슷했다. 이치마츠는 어릴 적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토도마츠는 막내다운 애교와 사랑스러움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런 여동생들을 보며 나는, 처음 발을 딛게 된 학교라는 정글에서 여동생들을 지켜야겠다 다짐했다.
아마 이때부터 언니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부모님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처럼 칭찬받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부모님은 입학식 때 오지 않았다. 지금은 안 온 것이 아니라 못 온 거라는 걸 알지만, 그것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기에 나는 아직도 그 일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끝을 알리듯 태양이 붉게 타올랐던 그 날을.
아침부터 기모노를 차려입고 화장을 하며, [입학식이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라고 하시던 어머니, 혹시라도 딸들의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할까,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피시던 아버지. 그 날의 광경은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나곤 한다.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던 나약하고 어리석었던 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 아래, 평화롭기만 했던 그 날의 기억.
입학식이 있던 그날, 우리는 먼저 출발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까웠기에, 느긋하게 준비하던 부모님은 결국 우리에게 먼저 가있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식이 시작하고, 끝이 났음에도 부모님은 오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낯선 새빨간 불빛이 집앞에서 반짝였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아, 이 불쌍한 아이들을 어쩌면 좋아] 라는 말만이 선명하게 맴돌았다.
영문도 모른 채 큰 차에 실려 끌려온 곳은 병원이었다. 몸이 떨릴 정도로 싸늘한 공간에, 새하얀 천을 덮고 누운 두 사람. 천을 들춰보지 않아도 부모님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부모님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충격이어서, 이후 경찰들이 상황을 설명해줬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동 보호 시설에 맡겨졌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혼이 나가버린 동생들 옆에 있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닫은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외로움]을 친구로도 달랠 수 없게 된 우리는, 주변에 울타리를 친 채 셋이서만 함께 하게 되었다.
만약 그대로 지금까지 계속 살았다면 외로움에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구하려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우리에게 그것은 오히려 독이었고, 사람들은 점점 우리에게 지쳐 멀어져 갔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늪에 빠져있으면서도 바보같이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랑 같이 놀래?]
그는 웃으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이치마츠도 토도마츠도, 나처럼 누군가에 의해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섯이 되었다. 어둡던 세상이 점점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도 입학식 때 부모님이 안 오셨어]
내 옆에서 그가 말했다.
[우린 아빠밖에 없지만. 잠깐은 우릴 보러 와줘도 될 텐데...그치?]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웃고 있는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나는 그때 뭐라고 했더라)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도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 이후로 한결 홀가분한 표정으로 지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난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의 나는 뭔가 그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했나 보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지만 우린 여전히 함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여섯 쌍둥이' 취급은 중학교에서 가서도 여전했다. 그래서 좋았고, 오히려 기뻤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감정은 남몰래 숨기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쵸로마츠. 좋아해]
그가 늘 입던 빨간색 옷이 눈앞에 가득 차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어딘지 편안해지는 기분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행복했다. 어릴 적부터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던 나를 따스한 빛으로 데려와준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여섯 명 중에 둘.
다른 의미로, 삼분의 일.
그와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 갈 것이다. 그곳이 설령 심해처럼 깊고 어두울지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부부로서 함께 하고 있다.
그가 죽을 뻔 했을 때는 넋을 잃고 울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묘하게 안심이 된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아직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나는 그가 죽지 않을 거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그와 결혼한 이후, 세탁물 속에 급하게 얼룩을 뺀 듯한 흰 옷이 섞여 있었다.
그런 옷은 이곳 누구도 입지 않는다.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이든 순순히 따를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옷을 입은 누군가가 우리 여섯 명의 세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평화로운 마츠노가를.
그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다.
그래.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다.
만약 무너진다면, 나는.........
* * *
[하-나도 모르겠당~!!]
큰소리와 함께 공중에 흩날리는 A4용지.
그 앞에 있던 다른 이들이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주워 읽어보려 하지만, 의미불명의 기호들로 가득해 의아한 표정만 짓는다.
[아- 정말! 오소마츠형에 관한 정보만 이렇게 암호화되어 있다구!! 대체 뭐야!! 이건 아인슈타인이 와도 못 풀 거라고!!]
예쁘게 묶여있던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이며 울부짖는 토도마츠. 그 옆에서 쥬시마츠가 등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지던 카라마츠가 입을 열었다.
[조직이 해체되어도, '미나즈키회'의 일급정보는 누군가 보호하고 있단 건가. 이거 정말 에이트 셧 아우...]
[으아아악, 아프다!!!]
[걱정마 토도마츠! 내가 막았어!]
[엣....]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세 사람 옆에서, 오소마츠, 쵸로마츠, 이치마츠는 계속해서 글씨를 들여다보고 있다.
[토도마츠. 이거, '미나즈키회'의 전 간부 컴퓨터에서 빼내온 정보지?]
오소마츠의 말에 토도마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응. 역시 간부니까 조직에 지시를 내린 인간의 정보를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한 건 알아내지도 못하고 카라마츠 오빠랑 쥬시마츠가 애써서 가져온 그것마저 풀어내질 못하다니..끝이야...]
미안.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며 사과하는 토도마츠를 쥬시마츠가 꼭 끌어안는다.
[얼른 암호를 풀었으면 좋겠지만, 그걸 못 풀었다고 해서 토도마츠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릴 일이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으니까!]
[쥬시마츠으으~~!!!]
자기들만의 핑크빛 세상에 빠져버린 두 사람을 보며, 다들 살짝 거리를 둔다. 자신들마저 저렇게 되어 버렸다간 일이 진전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속으로는 다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알콩달콩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이걸로 다시 원위치네. 가솔린 녀석 잡기 너무 힘들잖아~!]
오소마츠가 양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천장을 바라본다.
미나즈키회.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녀석이야말로 오소마츠에게 기름을 뿌려 죽이려한 패커리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마츠노 조직을 이를 최우선으로 조사하고 있다.
이미 끝난 일을 들추어내고 쫓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6명 각자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선 이 사건을 끝맺을 필요가 있었다.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어....이거, 해석하면 안 될 것 같아....뭔가....안 좋아...]
이치마츠가 쵸로마츠를 꼭 끌어안는다.
[왜? 이걸 풀면 가솔린 녀석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오히려 좋은 일이잖아. 풀 방법은 없지만...]
이치마츠의 말에 쵸로마츠는 시선을 떨군다.
[하지만 안돼....모두가 위험해져]
쵸로마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뭔가 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봤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다섯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거야...풀 수 없으니까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저녁을 준비해야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쵸로짱,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오소마츠가 방을 나가는 쵸로마츠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그러게...평소보다 냉정함이 부족한 것 같군. 형님, 오늘은 같이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는 히죽 웃는다.
[당연하지. 아~, 오랜만에 술이라도 같이 마시자고 할까~]
[그런 의미가 아니다만....됐다. 그게 오소마츠 나름의 애정표현일테지]
[그래그래. 나는 카라마츠처럼 사랑의 속삭임같은 건 할 줄 모르니까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나가야지]
[야구!? 오소마츠형 야구하는 검까!?]
[야구가 아냐, 쥬시마츠♡]
오소마츠는 피식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 요즘 많이 바빴지? 미안, 다시 뭔가 실마리가 잡힐 때까지 좀 쉬어둬. 각자의 애정사정은 알아서 하는 걸로♥]
다 함께 저녁을 먹고, 다 함께 목욕한 뒤인 늦은 저녁.
오늘은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도와준 덕에 집안일이 일찍 끝났다. 그 말인 즉, 우리 모두 각자의 배우자와 함께 할 시간이 조금 더 늘었다는 의미였다. 쵸로마츠는 평소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 했던 탓에 오소마츠와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여동생들도 외근이 잦은 배우자들 때문에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한 시가 아까울 법도 한데 도리어 자신을 도와주는 여동생들의 태도에 쵸로마츠는 의문을 느꼈다.
[너희들 갑자기 왜 그래? 빨리 돌아가서 남편이랑 같이 시간 보내야지. 왜 이러고 있어? 좀 의심스러운데...]
[무슨 소리야. 가끔은 도와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뿐인데 의심스럽다니 너무하네~]
[쵸로마츠 언니도 가끔은 오소마츠형이랑 같이 자. 최근에 같이 지내지도 못했잖아?]
토도마츠와 이치마츠의 꾸중에 쵸로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윽...그럼 두 사람은 어떤데? 뭐 진전이라도 있어?]
[나는 쥬시마츠랑 육체적 사랑만 갈구하는 사이가 아니거든-. 한 적이야 있지만, 그냥 같이 노닥거리는 게 더 즐거운 걸]
[카라마츠는 밤만 되면 불끈불끈해져. 마치 야수같아. 엄청 멋있어서 거의 매일밤 함께 하고 있어]
[뭐야 그게, 매일 밤!? 말도 안 돼!]
쵸로마츠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동생들이 이렇게 어른이 된 걸까. 물론 동갑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다.
충격을 받아 어깨를 덜덜 떠는 쵸로마츠에게, 어디서 가져왔는지 토도마츠가 술 한 병을 건넸다.
[뭐야 갑자기!?]
[오소마츠형 지금 침실에서 혼자 마시고 있는 것 같던데, 가끔은 어울려주는 게 어때?]
토도마츠와 이치마츠가 웃는다. 쵸로마츠는, 그 웃음이 어딘가 섬뜩하게만 느껴진다.
쵸로마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쵸로마츠가 술을 들고 방으로 가자, 토도마츠 말대로 오소마츠가 혼자 반주를 즐기고 있었다. 쵸로마츠를 발견한 오소마츠가 술잔을 기울이며 헤실거린다.
[쵸로마츠, 빨리 왔네.]
[응. 토도마츠랑 이치마츠가 도와줘서.]
[그래? 녀석들 간섭하지 말랬더니만...]
[응?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술 한 잔 부탁해도 될까? 오늘은 좀 더 마시고 싶거든.]
오소마츠가 빈 잔을 들어보이며 쵸로마츠에게 손짓했다.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가지고 온 술을 빈 잔에 따랐다.
[쵸로마츠...요즘 무슨 일 있어?]
그냥 으레 하는 안부인사인 양 물었지만, 어딘가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쵸로마츠는 긴장감을 감추려는 듯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아무 일도 없어. 저번에도 같은 거 물어봤었지? 숨기는 거 없냐고.]
[그랬지. 하지만, 조금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쵸로마츠의 변화는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알아차리기 쉬우니까.]
벌컥, 술을 단숨에 들이켜는 오소마츠. 쵸로마츠는 무릎 위에 얹는 손을 꽉 쥐고는 입을 열었다.
[...오소마츠. 가끔은 나한테도 한 잔 따라주지 않을래?]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쭈뼛쭈뼛 말하는 쵸로마츠에, 오소마츠는 살짝 놀란 눈치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쵸로마츠 쪽에서 먼저 한 잔 달라고 요청해 오다니, 상당히 드문 일이다.
[...어, 그래. 마셔마셔. 그래도 너무 마시지는 말라고, 너랑 제대로 얘기하고 싶으니까.]
여분의 잔을 쵸로마츠에게 건넨 오소마츠가 술을 따랐다. 투명한 술이 쪼로록, 작고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을 채운다.
쵸로마츠는 멍하니 잔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기운 좋게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하는 소리가 작게 울린다.
[...쵸로마츠.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너의 제일 행복한 순간이 언제야?]
쵸로마츠는 빨리도 술이 도는지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오소마츠의 의외의 질문에 당황해 휘둥그레진 눈이 오늘따라 더 맑고 커보인다.
[당연히 오소마츠가 옆에 있어주고, 다른 녀석들이랑 함께 실없는 농담도 하고 그냥 그렇게 즐겁게 지내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쵸로마츠의 무방비한 모습에 오소마츠는 몸이 화악 달아올랐다.
쵸로마츠가 뭐라고 말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도 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을 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쑥스러운 듯 웃는 것이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그 미소에 오소마츠는 굉장히 약했다. 그리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도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안심이야.]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쵸로마츠 옆에 앉았다. 손끝으로 쵸로마츠의 목을 쓰다듬다 살짝 끌어당겨 이마, 볼 순으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저항 안 해?]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자, 쵸로마츠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응. 만져도 괜찮아.]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귓불을 살짝 깨물고는 달콤한 저음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봐주지, 않을 건데?]
깜짝 놀란 쵸로마츠를 가볍게 안아들고는 포근한 이불에 내려놓는다. 두 사람은 깨끗한 이불 위에서 입을 맞춘다. 처음에는 천천히, 부드럽게 서로를 알아가듯 입을 맞추던 둘은 점점 달아오르는 몸과 함께 혀를 뒤섞는다. 잠시 후, 오소마츠가 살짝 눈을 뜨자, 흥분감에 눈가가 붉어진 쵸로마츠의 눈이 보였다.
아아, 참을 수가 없다.
마치 부추기는 듯한 이 눈빛은 뭘까. 평소와 달리 저항하지도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입술이 떨어지자 은빛 실이 길게 늘어져 떨어진다. 아직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쵸로마츠의 옷을 천천히 벗기자, 비단처럼 매끈한 살갚에 드문드문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술을 마시면 피어나는 자국이었다. 다섯 개의 붉은 점이 하나로 모여 마치 꽃처럼 보였다. 그 중 하나에 입을 맞추자, 예민해진 몸이 들썩였다.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그가 도대체 무얼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발 가르쳐줘, 쵸로마츠.
몇 번이고 맛보고 싶은 달콤함에 오소마츠는 사로잡혔다. 이렇게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는 여자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채워버리고 싶었다. 완고한 그 마음속을 전부 지배하고 싶다. 이 손으로.
[오소마츠..., 나...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믿어..줘.]
듣고 싶지 않아 쵸로마츠의 입을 막아버린다.
시끄러워, 거짓말쟁이.
그런 심술궂은 말을 속으로 삼키는 오소마츠.
지금이 만족스럽다면 왜 가끔 공허한 눈을 하는 거야?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아아, 속상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
부수고 싶지 않음에도, 억지로 그 마음속을 파헤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점점 커져, 괴로웠다.
노란빛의 인영(*사람의 그림자 혹은 자취)이 끊임없이 덤벼드는 적을 쓰러뜨린다. 고통과 공포에 찬 비명이 폐건물의 차디 찬 벽에 부딪쳐 메아리침에도 밖은 고요하기만 하다. 적들 중 그 누구도 그가 휘두르는 방망이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콘크리트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바닥이 점점 붉게 물들어감에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미친, 개-...]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적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려 했지만, 출구에는 푸른색 기모노 차림의 남자가 문에 기대어 서있었다.
[유감이지만, 단 한명도 살려 보낼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며 일본도를 뽑아든다. 반짝이는 칼날이 춤을 추듯 흩날리자, 비명과 함께 더욱이 바닥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잔챙이들을 전부 처리하자, 지도자 격인 녀석이 겁에 질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 살려줘...!]
[조직에 반기를 든 시점에서 너희들의 운명은 정해졌다. 하지만, 하나만 물어보지....대답에 따라, 살려줄 수도 있다]
[뭐, 뭐를...]
[너희들한테 하극상을 지시한 녀석.....누구지?]
[그, 그런 거 없....히익!]
날카로운 칼날이 남자의 목을 겨눈다. 그 차가움과 날카로움에 남자는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있잖아-?]
낮으면서 무척이나 차가운 목소리.
지금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예감한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녀, 녀석은 우리 조직원이 아니라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 늘 목소리를 변조해서 전화를 걸었어. 지금이 너희들을 치고 조직을 먹을 기회라면서....]
[녀석의 목적은 뭐지?]
[몰라....요구 같은 건 없었어]
[그래...알겠다. 약속대로 살려주지. 껴저라]
푸른 기모노의 남자는 꼴사납게 달려가는 녀석을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쥬시마츠-! 이제 그만 돌아가자!]
[응! 아, 잠깐만! 아직 5명 살아있어! 제대로 보내버려야-]
[쥬-시마츠~?]
[.....응, 알겠어 카라마츠형]
철퍽.
쥬시마츠는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시뻘건 피바다에서 벌떡 일어나 카라마츠 곁으로 달려갔다.
[정보는 건졌어!?]
[아니, 전과 똑같더군. 목소리를 변조한 누군가가 지시를 내렸다더군. 달리 요구는 없었던 듯하다]
두 사람은 며칠전에도 마찬가지로 미나즈키회의 잔당들을 처리하러 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이렇다 할 이득은 없었다. 지금으로 봐선 녀석들의 증언에 신뢰는 가지만, 문제는 흑막이 누구냐는 거였다. 카라마츠와 쥬시마츠는 요 며칠 동안 그걸 계속해서 조사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녀석은 마츠노 조직을 무너뜨리고 싶은 게 아닐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업무상 원망을 살 일이 많다보니, 적을 추려내기가 힘들군]
[그렇네! 엄청 죽였으니까 말이야!]
[그것만인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그보다 빨리 돌아가자. 너 토도마츠랑 약속있었던 거 아닌가?]
[맞아!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리 토도마츠라도 이런 꼴인 나랑 과자 만들기 싫지 않을까...]
입꼬리를 살짝 늘어뜨린 채 풀이 죽은 동생에, 카라마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내일은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토도마츠도 내일 휴무 아닌가? 같이 과자라도 만드는 게 어ᄄᅠᆫ가?]
[응!!]
두 사람은 어둠 속에 홀로 서있는 검정차로 향했다. 가위바위보에 진 카라마츠가 운전대로 향하고, 기모노의 피가 시트에 묻지 않도록 두꺼운 수건을 깔고 앉아 집으로 돌아간다.
마츠노 조직은 오소마츠가 보스의 자리에 앉은 이래로 평화적인 조직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자신의 조직원들만 건들지 않는다면, 다른 조직 간의 싸움에는 관심도 없고 귀찮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뒷세계에 일에 꽤 소극적 태도를 보였지만, 그것이 반대로 일반인들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조직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조폭이 돈을 버는 길은 더럽고 추악한 뒷세계의 일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평화적 조직이라며 세간의 지지를 받는다 한들, 필연적으로 남들의 원망을 사는 일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 제대로 뜯어내라고. 응, 그래도 되긴 하지만, 그랬다간 네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이것도 일이라는 걸 알잖아? 응- 그럼]
달칵, 가볍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소마츠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오소마츠의 곤란해 보이는 모습에,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쵸로마츠가 걱정스레 묻는다.
[신변 보호료(*폭력단이 음식점 등에서 신변을 보호해주는 대신 뜯어가는 돈) 못 뜯어내서 곤란한 녀석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조직을 나가려는 녀석이 있는데. 왜, 알잖아? 나가는 대신 손가락을 잘라간다든가 뭐 그런....암튼 그거 대신 돈으로 값을 치르기로 했는데. 돈을 받으러 간 녀석이 마음이 약한 녀석이라서 말이야. 게다가 전부터 곧잘 챙겨주던 녀석이라던 모양이라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훈련삼아 보내봤더니만..이렇게 전화나 걸고 말이야-!]
하아~ 횽아 힘드러~, 라며 오소마츠는 탁자에 엎드려 훌쩍훌쩍 우는 척을 한다.
[최근 그만두겠단 녀석들이 많네. 왜지?]
그런 오소마츠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쵸로마츠는 전병을 뜯어 먹으며 말했다. 오소마츠는 이내 울음(우는 척)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나는 가겠다는 녀석은 안 붙잡아. 애초에 싫다는 녀석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도 싫고. 그치만 최근에 그런 녀석이 많은 건 사실이라, 조사를 좀 해봤는데 딱히 이렇다 할 결과는 없었어.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그런 불길한 소릴! 너 이 조직의 보스라고!?]
[그치만, 드디어 '가솔린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 걸]
가솔린이란 말에 쵸로마츠가 얼어붙는다.
[왜 갑자기 그 녀석이 나와?]
['가솔린 녀석'는 마츠노 조직을 빼앗거나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녀석이야. 차기 조장에게 자객을 보내는 등, 직접 손을 쓰기까지 하는 녀석이니 상당한 원망을 가진 녀석일지도 몰라. 그런데도 지금까지 조금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건, 조직 어딘가에 숨어있거나, 다른 엄청난 방법이 있는 거겠지...]
오소마츠는 이쑤시개로 부드러운 화과자를 먹기 좋게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쵸로마츠는 다시 차를 한 번 홀짝이곤 생각에 잠겼다.
[오소마츠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겠지만,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아직 몰라. 확실한 건 뒤에서 누군가 조종하고 있단 건데, 그래도 아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아~ 너무 졸려~! 쵸로마츠, 무릎 좀 빌려줘!]
벌렁 드러누운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하지만 나, 다음에는 꼴사나운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장남이니까]
그렇게 말한 오소마츠는 눈을 감았다.
[‘보스니까’겠지...바보]
쵸로마츠는 자신의 무릎 위에서 편하게 잠든 오소마츠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내,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카라마츠와 쥬시마츠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코인 샤워룸에서 피에 젖은 몸을 대충 씻어내고, 챙겨갔던 옷으로 갈아입고 오느라 시간이 늦어졌다. 생각보다 늦어진 탓에, 둘은 사랑스런 아내에게 뭐라 사과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집에 들어갔지만, 필시 화가 났으리라 생각했던 아내들은, 더럽고 불쾌한 공간에서 돌아온 직후인 두 사람에겐 조금 자극이 강한 광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치마츠 언니, 같이 목욕하자]
[그래. 내가 등 밀어줄게, 톳티]
이치마츠와 토도마츠는 잔뜩 흐트러진 채로 찰싹 붙어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말을 주고받는 입이 서로 닿을 듯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카라마츠와 쥬시마츠는 [다녀왔어]라고 말하며 문을 열었지만, 그 광경을 보자마자 혼란스러움에 문을 다시 닫았다.
[쥬, 쥬시마츠....봤는가]
[....봤어, 카라마츠형]
[방금 그게 뭐지...이치마츠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나도, 저렇게 에로한 토도마츠 처음이야...]
[....어쩌지?]
[...잠깐만. 코피 나올 걸 같아]
[!?참아라 쥬시마츠!! 이, 일단 다시 확인해보자. 착각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내들이 무언가 새로운 문을 열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심장이 가라앉질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방금 그 광경에 다른 의미로 심장이....라며, 카라마츠는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의지를 다진 카라마츠는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는 그대로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문 바로 앞에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어서와 쿠소마츠]
이치마츠가 한 발 내딛으며 카라마츠 바로 옆에 섰다. 어딘가 음험한 그녀의 미소에 카라마츠는 저도 모르게 [힉]하고 작게 비명을 내지렀다.
[보고 싶었어, 쥬시마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괜찮아. 화 안 났어♡]
달콤한 목소리와 달리, 토도마츠의 커다란 눈은 싸늘하게 식어 쥬시마츠를 바라본다. 토도마츠의 차가운 시선에 쥬시마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요즘 아침, 점심, 저녁 하루종일 얼굴도 못 보는 건 왜일까? 왜 그런지 알아? 쿠소마츠]
[쥬시마츠도,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으면 연락이라도 하라구? 엄청 서둘러서 왔는데 소용없게 됐잖아?]
얼굴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섬뜩하게 웃는다. 카라마츠와 쥬시마츠는 그대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 시작했다.
[어라? 카라마츠랑 쥬시마츠잖아? 돌아왔음 보고하라고~, 형아 왕따시키는 건 시러잉~]
오소마츠가 네 사람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 히죽거리던 얼굴을 싹 바꾸곤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양 어깨를 부여잡으며, 쥬시마츠는 토도마츠의 양 볼을 잡으며 맹렬한 기세로 다가갔다.
그들의 기세에 깜짝 놀라 이치마츠와 토도마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화악 붉히고 아까와는 다른 한껏 풀어진 미소를 보인다.
[그럼 방으로 가자, 쥬시마츠. 마사지 해줄게!]
[용서해 주는 거야!? 고마워, 토도마츠! 토도마츠의 마사지 정말 좋아!]
[카라마츠도..돌아가자.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마사지 해줘...끝나면 나도 해줄게]
[내, 내가 이치마츠한테 마사지를 해주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건가!]
소란스럽게 방으로 돌아가는 네 사람을 바라보며, 오소마츠는 쓸쓸히 남겨졌다.
방으로 돌아간 오소마츠는, 바닥에 깔린 이불에 들어앉았다. 쵸로마츠는 설거지와 빨래로 바빠서 아마 한동안은 방에 돌아오지 않을 거다.
벽 한 장을 사이에 둔 형제들의 방에서는 즐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진 엄청 싸늘했으면서,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지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아까 내가 본 건 뭐였지, 싶으면서도 녀석들의 관계는 언제까지고 변함없겠구나 싶어 어쩐지 부러워졌다.
쵸로마츠가 좋다.
하지만 쵸로마츠의 태도는 어딘가 공허했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오소마츠는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일부러 형제들 앞에서 더욱 붙어 다녔다. 그렇게 스스로의 부족함도 채우려 했다.
쵸로마츠는 상냥하다. 오소마츠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녀는 여신과 같은 상냥함을 가졌으면서 어쩔 때는 반야처럼 무섭게 화를 내고 꾸짖으며, 언제나 오소마츠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이기에, 동생들보다 더 응석을 받아주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쵸로마츠와 그 사이에는 얇은 막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몸에 닿기라도 하면 놀라서 몸을 움츠렸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기쁜 얼굴 뒤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둠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응석을 받아주는 대신 자신이 응석을 부리기로 했다. 그녀를 의지하기로 했다. 쵸로마츠 앞에서만은 떼쟁이 장남으로 있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벽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것뿐인 걸까. 벽을 깨보려 했지만, 어느새 벽은 더욱 멀어져 있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다. 무작정 다가가면 벽 너머의 쵸로마츠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그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했다. 그것이 오소마츠는 너무도 답답했다.
쵸로마츠는, 우리 여섯명 중 가장 빨리 어른이 되었다. 정신적으로. 어른으로서 자각을 갖게 된 이후부터는, 우리 모두를 지탱해주었다. 그래도 가끔 덤벙거릴 때도 있고, 거짓말을 하면 금방 얼굴에 드러나고, 막내 여동생의 어리광을 잘 받아줬다. 그것을 틈타 오소마츠도 자주 남동생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남을 잘 돌봐주는 쵸로마츠는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남동생 대하듯 꾸짖기도 하고 보듬어주기도 했다. 또 장남과 장녀라는 공통점도 있어 서로 통하는 부분도 많았다.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어서인지 서로 다툴 때면 욕도 서슴없이 할 정도였다.
[뭐가 녀석을 변하게 만든 걸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부턴가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에게 함부로 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오소마츠 외에는 가차없었다. 그것이 쵸로마츠의 작은 변화를 주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소마츠만은 그 변화를 알아챘다. 그런 쵸로마츠의 마음에 한 발 내딛지 못하는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 여기서 더 변해버리는 것이 두려운 거다. 미지근한 물 같은 이런 애매한 상태가 더 틀어져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정말 한심하네...]
오소마츠는 다시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장의 등에 매달린 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쵸로마츠가 돌아오면 밤새 끌어안고 잠을 자야겠다 마음을 먹은 그는 쵸로마츠의 이불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띠로링.
어두운 방에 전자음이 울렸다.
딸각, 마우스 클릭 소리가 울리고,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옷장을 열고, 입고 있던 녹색의 기모노를 벗고 하얀 소복을 몸에 걸쳤다.
허리띠를 단단히 맨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_완벽하다. 오늘도 완벽한 “흰색”
오늘도 모두의 저녁식사에 약을 타두었다.
자, 나갈 시간이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 당당하게 현관으로 향한다. 밖에 나가니 검은 차가 한 대 서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5분 정도. 신경 쓰지 마]
무언가에 가려진 듯 불분명하게 흘러나온 저음의 목소리. 뒷좌석에는 이미 한 남성이 타고 있다. 그의 얼굴은 윗부분이 검게 칠해진 가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뒷좌석에 오르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좀 힘을 써야 될 거야. 네 비단 같이 고운 살갗이 더러워지는 건 참을 수 없지만]
[상관 없어요. 제 피부는 그냥 조금 예민할 뿐이니 그런 표현은 삼가주세요]
[그 매정함이 네 매력이지. 오늘 일이 끝나거든 한잔 하는 게 어때, 쵸로마츠군]
가면을 쓴 남자의 오른손이 여자의 허벅지를 미끄러져 내려가듯 쓰다듬는다. 여자는 꼼짝도 않고 말했다.
[생각해볼게요]
심야의 어둠속을 달리는 차 안, 희미하게 비춰드는 가로등 불빛에 여성의 얼굴을 비춘다.
입꼬리가 내려간 그녀의 입은 불쾌한 듯 작게 비틀리고, 그녀의 차갑게 식은 눈이 창밖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